지난 5년 동안 아내 몫 까지 하며 아들을 키우려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촌누님께서 전화를 하셔서 "세월도 이만큼 흘렀고 하니
이제 재혼을 해야지..."
떠나간 사람도 그걸 원할 거야, 하며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누님과 몇 번의 통화 끝에 저와 동갑이고, 동생들과 어머님 뒷바라지
하느라 시집을 못 갔다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맞선보러 나가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문갑에 놓인 아내사진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사과를 했습니다.
'여보! 미안해, 혼자 살기 참 힘드네, 이해해줘..
듣는지 마는지 사진속의 아내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그리곤 약속장소로... 그녀가 다가와 재우씨인 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첫인상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이런저런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문득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를 병으로 잃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상대방 건강에 관심이 많다고요.
그녀 역시 제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 마음을 위로 해주었습니다.
6남매의 맏딸인 그녀는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또한 동생들 시집 장가보내느라 정작 자신은 연애 한번 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늦었지만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고
저를 만나러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만나는 횟수가 거듭되자 저도 모르게 제 황량했던 가슴속에서 점차
따뜻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자기 집으로 저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녀는 거실이 춥다며 안방으로 저를 안내 하였습니다.
미색벽지에 노란 장판이 깔린 그녀의 방에서
그녀는 "원래 엄마가 쓰던 방인데 이제는 제가 써요"하면서
수줍게 웃으며 따뜻한 생강차를 따라왔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녀와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습니다.
“못난 사람이고 마음에 상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수진씨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와 결혼 해주실 수 있습니까?”
제 청혼에 일주일만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초조한 일주일을 보낸 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자기와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종교도 달라서 안 되겠다고 하든군요.
이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말입니까?
한 인간이 물질적으론 풍족하지 못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서로의지하며 고난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마음속으로 생각 했는데,나도 모르게
나의 현실 앞에 그저 눈물만 나더군요.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눈물의 흔적을 보일 수 없어 나 역시 “인연이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사세요” 하면서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후 흐르는 눈물을 감추고 그동안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호의가
다 거짓이란 말인가? 정말 견딜 수 없는 배신감마저 느꼈습니다..
저는 그 상처를 다스리기까지 오래 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집안 행사로 저는 그녀를 소개해준 사촌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촌누님이 저를 보자마자 대뜸 그랬습니다.
“동생, 수진이 소식 못 들었지? 나도 얼마 전에 같이 서예 하던 사람에게
소식을 들었는데 수진이가 죽었다네. 위암으로...
동생이랑 결혼하려고 마음먹고 종합 진단받으러 갔다가 위암진단 받았데...
7개월 동안 혼자투병하다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났대...착하고 젊은 사람이,
꼭 너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하더란다.
저는 순간 시야가 갑자기 뿌옇게 흐려지면서 정신이 멍 해졌습니다.
무슨 운명에 장난일까요?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나만 두고
홀로 떠나야만 할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그녀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는
“용미리” 추모의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들도 함께 데리고 갔지요. 납골당...
칸칸이 안치된 작은 사진 속에서 낯익은 그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전히 그 갈색 코트를 입고 희미하게 웃고 있는 청초한 그녀...
나는 아들과 함께 들고 간 꽃을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수진씨, 우리 아들이에요. 절 받아요...”
아들도 제 마음을 아는지 마치 자기 엄마에게 하듯 깍듯이 절을 했습니다.
내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외롭게 앓다 혼자 떠난 그녀..
부디 하늘나라에서나 편히 쉬시길..
그날 아들과 손잡고 그곳을 떠나오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아들아! 이제 두 번 다시 사랑하지 않으련다. 두 여자로 충분하니까..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