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아델을 중심으로 아델과 엠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첫 눈에 반해 빠져들고 함께 생활을 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치관의 차이에 부딪혀 이별하게 된다.
둘은 다시 만나 관계의 회복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둘은 이별을 택한다.
아델은 혼자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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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보다는 아델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됐다.
생전 처음으로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빠져들게 되는 사춘기의 혼란스러움과
한 사람을 향해 멈춰지지 않는 그 마음에 동하고 말았다.
아델과 엠마,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엠마가 가진 예술적 자의식도, 아델이 가진 실용주의적 가치관도 처음엔 모두 사랑스러운 서로만의 특질이었다.
이 때 엠마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말하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그러니까 어떻게 살기로 선택하는 의지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대사.
그만큼 엠마에게 삶이란 어떤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무언가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델은 실존주의에 대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 비슷하다며,
무엇이 앞선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답한다.
이 때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가치관을 재밌다고 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만난지 얼마 안됐으니까.
시간이 흘러 엠마는 파랑 머리에서 금발이 되었다.
엠마는 계속 미술을 하고 있고, 아델은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다.
엠마는 아델이 자신이 가진 글쓰기 재능을 이용해 무언가를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델은 먹고사니즘을 중요시하는 부모님처럼 실용적으로 자신의 직업(유치원 교사)을 유지한다.
그리고 엠마를 위해 음식을 한다. 엠마의 전시에 온 사람들에게 음식을 챙기는 모습은 영락없이 엠마의 여자친구다.
바꿔 말하자면, 이 때 엠마는 남자처럼 보인다.
이 날 밤, 아델은 엠마와 섹스를 원하지만, 엠마는 핑계를 대며 섹스를 하지 않는다.
어느덧 두 사람의 관계는 개별 존재로서 빛이 나던 '여-여' 커플의 모습이 아니라
지루한 '남-여'커플의 모습처럼 되어 버린 듯 하다.
이러한 균열들이 생기며 영원할 것 같던 두 사람의 사랑은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델의 외도였다.
엠마는 아델의 외도를 목격하자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낸다.
아델에게 창녀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집에서 쫓아낸다.
그러나 아델이 외도하게 된 원인은 엠마의 외도였다.
엠마의 외도는 성적인 외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델을 외롭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외도가 맞다.
엠마와의 갭이 커지면서 홀로 외로움이 커져가던 아델은 자신도 모르게 외도를 하게 됐고,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엠마는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자신의 잘못은 돌이켜 보지도 않으면서 아델을 다그치기만 한다.
바보같은 아델은 엠마를 붙잡고선 너 없인 살 수 없다며 잘못했다며 매달린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이별한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재결합을 할 것 같은 분위기도 풍기지만,
이별을 택한다.
이 때 엠마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너에겐 무한한 애틋함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는 대사.
여전히 아델을 사랑하는 듯 말한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없다.
결국 둘은 이별한다.
이 때 아델의 얼굴은 압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델의 그 얼굴에 가슴을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어떻게 보면 매우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이 통속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건 아델의 얼굴이며, 그 얼굴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두 말할 것 없이 아델의 연기는 눈부시다.
누구나 그녀의 가공되지 않은 듯한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 것이다.
엠마 역시 훌륭하다. 두 사람의 호연은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내가 터질 듯한 가슴을 억누르느라 공황 상태가 되어버렸던 건,
두 사람의 호연에 한 가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음증적 시선으로 지켜본 카메라 때문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카메라는 일종의 시선을 가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거의 100% 핸드헬드인 듯한 이 카메라는 매 씬마다 좀 길다 싶을 정도로 인물을 지켜본다.
보통 감독들이 가장 경제적으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압축적인 씬 연출을 하는 것과는 달리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매 씬마다 인물을 지켜본다.
이 지켜봄은 그저 바라본다기보다는 뭔가 필요이상으로 지켜보는 듯한,
때때론 마치 훔쳐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때문에 이 지켜봄이 개인적으론 '관음'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해보면, 관음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이 있다는 것이고,
이 누군가는 카메라, 즉 관객의 시선이 된다.
관객들은 아델과 엠마를 필요이상으로 지켜보며 그들의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내 안에 둘의 사랑과 사랑의 여백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더욱 정확히는 아델의 마음이 내 안에 쌓여갔다.
때문에 아델이 엠마를 붙잡고 매달릴 때,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엠마를 떠나 보낼 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차곡차곡 쌓인 사랑이, 외로움마저 사랑이었던 그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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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같은 이별의 순간들이 지나고,
마지막 아델이 엠마의 전시장을 찾아갔다가 홀로 전시장을 나오는 엔딩씬.
아델은 아직 엠마에게 마음이 있었으리라.
아델이 전시장을 박차듯이 나오게 된 그 마음은 따뜻함이었을지 슬픔이었을지 모르겠다.
다만 아델이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뒷모습이 나에겐 울음을 참는 아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지금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파란색 원피스,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델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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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다 보고 난 후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 영화다.
같은 해 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비슷한 시기에 국내 개봉을 한 <인사이드 르윈>과 비교를 하자면,
<인사이드 르윈>은 다 보고 난 후 코 끝이 찡해지는 겨울 바람처럼 가슴이 차가워지는 영화이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아델이 주룩주룩 흘린 눈물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종국엔 르윈의 절박한 노래에, 아델의 얼굴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느끼게 된다.
특히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3시간의 러닝 타임이 무색할만큼
이대로 끝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마법같은 영화다.
한동안 아델과 엠마가 계속 생각날 것 같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