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인기 여행지 이탈리아 로마,
낭만이 흐르는 도시 피렌체, 운하와 골목길이 아름다운 베네치아, 패션의 중심 밀라노,
지중해를 품은 중부 아시시를 비롯해 남부의 포지타노까지
각 도시마다 그곳만의 독특한 매력이 가득한 곳이 이탈리아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심인 나라 이탈리아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나라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배경인 곳이어서 책을 떠나 직접 두발로 즐기며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어서 언제나 인기가 많은 것 같다.
뚜벅뚜벅 두 발로 걸으며 로마의 오랜 역사를 만나는 시간.
오랜 역사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로마 여행은 팔라티노 언덕, 포로 로마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콜로세움에서부터 시작해서 둘러보았다.
검투사들의 대결과 호화로운 구경거리가 펼쳐지던 거대한 로마의 원형 경기장 Colosseum
경기장은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쿼바디스,벤허등 영화에서도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싸우거나,
맹수들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많이 봤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의 격언에 대해 이탈리아 로마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많지 않다.
로마 시내에는 무려 2,000여년 전의 유적이 발길에 걷어차일 만큼 많다.
하나하나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고대 로마의 시작 포로노마노
로마의 뿌리를 밝히고자 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라는 작품에 로마 건국신화를 기록했다.
여기서 베르길리우스는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스를 자신들의 선조라 여겼다.
트로이 전쟁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뒤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스가 전 세계를 떠 돌다가
이탈리아 로마 근처에 정착해 토착 민족과 연합해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로마를 직접 세운이는 아이네이스의 후손이 로물루스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쌍둥이로 아이네이스가 세운 나라 왕자로 태어났다.
대부분의 건국신화에는 출생의 비밀이 담겨있는데
이들은 왕위를 탐낸 외삼촌 아물리우스의 흉계에 강보에 싸 티베르 강에 버려진다.
강의 신이 형제를 안전하게 옮겨 주었고 늑대가 형제에게 젖을 먹이며 키운다.
이후 형제는 양치기부부에게 구출되어 무사히 자라나고
몇 년 뒤에 도시를 세우게 된다. 어느 언덕에 도시를 세울지를 두고 다툼을 벌인 끝에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국한다. 기원전 753년이다.
늑대의 젖을 빨고 있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로마 시내에는 고대 로마 시대 인물들의 동상이 많은데 그 중 카이사르가 가장 인기다
'유럽'의 창시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대답이 많다.
그는 당시에도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정치가이자 장군이었다.
실제로는 과두체제인 공화정을 폐지하고 기원전 1세기 중반 황제의 전제정치를 시작한 인물이다
Arch of Titus <티투스 개선문> 황제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 중 가장 오래된 것
한 사람 한 사람의 황제와 그들의 업적을 영광스레 기념하기 위해 설계된 로마의 개선문은,
전투를 마치고 승리에 차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군대를 환영하기 위한
도시의 웅장한 승리 행렬이 벌어지는 핵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에는 적어도 34개의 개선문이 세워졌는데,
티투스 개선문은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이다.
포로로마노 그야말로 거대한 돌 무더기였다.
셉티무스 세베루스황제 개선문등만이 남아 있고 거의 다 무너지고 뜯겨져서 너무 아쉬웠다.
1500년의 고대 로마 유적지가 불과 한 달만에 교회를 짓는등의 행위로 해체 되었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너무 아쉬운 문화재 훼손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