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생에게나 시련은 있다. 하지만 그 시련이 모든 인생을 파탄으로 몰아가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흔들어대는 시련보다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로운 존재이다. 어떤 사람은 그 시련을 정면 돌파하고, 어떤 사람은 소나기를 피하듯 살짝 비껴 간다. 어느 쪽이나 강하고 지혜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몽골 고원에 버려졌던 ‘애비없는 소년’ 칭기스칸은 더 놀라운 돌파를 시도했다. 주어진 시련을 새로운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칭기스칸은 아홉 살 때 옹기라트 부족장의 집에서 데릴사위로 산다. 옹기라트 부족장인 데이 세첸의 딸 버르테와 결혼을 했고,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집으로 달려온다.
몇 년 후 버르테를 데리고 온 칭기스칸이 가족들과 함께 케룰렌강 상류 ‘물안개 피는 언덕’(몽골어로 보르기 에르기)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희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새벽에 3백 명의 메르키트 부족 전사들이 그곳을 습격했다. 그들은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 칭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을 약탈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를 납치해 갔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테무진은 너무나 슬펐다. 그러나 자신 앞에 밀어닥친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피납 사건을 기상천외한 반전의 기회로 삼는다. 미래는 비관론자가 아니라 낙관론자가 여는 것이다. 낙관론자는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비관론자는 책임 소재를 가리게 돼 있다.
당시 몽골 최고의 실력자는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였다. 칭기스칸은 옹칸을 설득하고, 자신의 의형제였던 자모카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메르키트 공략에 나섰다. 칭기스칸의 이같은 ‘아내 구하기 전쟁’에 대해 [몽골비사]는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몽골비사]는 몽골 유목민들의 역사를 알리는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한밤의 기습에 메르키트 백성들은 허둥대며
셀렝게강을 따라 급하게 도망쳤다.
테무진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버르테! 버르테!”를 절규하며 외쳐댔다.
그리운 아내를 애타게 찾았다.
바로 그때 도망치는 한 무리의 백성들 가운데
그 소리를 듣고 우차(牛車)에서 뛰어내리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자기를 부르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번쩍번쩍 빛나는 테무진의 말고삐와 말에 맨 끝들을 움켜 잡았다.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버르테!”
말없이 흐르는 격정의 눈물 속에 테무진과 버르테는
서로를 맹렬히 끌어안았다.
2년 만에 아내를 구출한 칭기스칸, 그러나 아내 버르테의 뱃속에는 적장 칠게르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버르테는 남편과 재회한 후 곧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주저하지 않고 이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그는 아이에게 “우리 몽골인에게 나그네처럼 다가온 아이”라 하여 ‘조치’(나그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적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 것과 적의 아들을 ‘아들’로 삼는 것은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훗날 칭기스칸의 후계자 문제가 거론됐을 때, 아버지가 다른 형제인 장남 조치와 차남 차가다이가 싸움을 벌였다. 둘은 칭기스칸 앞에서 몸싸움까지 벌였다. 그때 몽골의 샤먼이자 가족의 보호자 격인 쿠쿠추가 나서 두 사람의 어머니인 버르테를 변호했다. [몽골비사]는 이렇게 전한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럴 때
다른 남자를 원해서 간 것이 아니다
교전 중에 그리 되었다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전투 중에 그리 되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 것이 아니다
서로 죽일 때 그리 되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함께 고생하며
높다랗게 머리를 묶고
잘끈 허리띠를 동여매고
모자를 단단히 눌러 쓰고
그대들을 기를 때
음식을 삼킬 사이에 그대들을 주고
당신의 목구멍을 좁혀
당신의 모든 것을 주고
주린 채 다녔다
그대들의 빗장뼈를 당겨
남자답게 누가 만들었는가?
그대들의 목을 잡아 늘려
사람답게 누가 만들었는가?
그대들의 몸을 씻기고
그대들의 발꿈치를 들게 하여
남자의 어깨뼈에
거세마의 엉덩이에 닿게 하고
이제 그대들이 잘되기를 보겠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는가?
고통과 희생의 나날을 보낸 어머니의 삶을 듣고서 두 아들은 싸움을 멈췄다. 이 싸움을 목격한 칭기스칸은 조치에게 새로운 땅을 개척할 것을 명한다. 기회를 얻은 조치는 러시아와 헝가리 초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조치와 그의 아들 바투칸이 건설한 새로운 제국이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킵차크칸국(알탄오르도)였다. 킵차크칸국은 일칸국, 차가다이칸국, 어거데이칸국과 함께 몽골 제국의 4대 칸국 중 하나이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혹시,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은 따로 없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손가락이 특별이 약하거나 상처를 입고 있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칭기스칸은 가장 나이 많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조치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의 끈을 놓치 않았다. 유럽을 정벌하던 조치가 사망했다는 전갈이 온 날, 칭기스칸은 하루 종일 겔 안에 틀어박혀 슬피 울었다고 한다. 자식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상처속에서 자라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착민 중에서 강간 당한 아내가 낳은 자식을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칭기스칸은 아홉 살 때 옹기라트 부족장의 집에서 데릴사위로 산다. 옹기라트 부족장인 데이 세첸의 딸 버르테와 결혼을 했고, 당시 풍습에 따라 처가살이를 한 것이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게 집으로 달려온다.
몇 년 후 버르테를 데리고 온 칭기스칸이 가족들과 함께 케룰렌강 상류 ‘물안개 피는 언덕’(몽골어로 보르기 에르기)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희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새벽에 3백 명의 메르키트 부족 전사들이 그곳을 습격했다. 그들은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 칭기스칸의 어머니 허엘룬을 약탈당한 데 대한 보복으로 테무진의 아내 버르테를 납치해 갔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테무진은 너무나 슬펐다. 그러나 자신 앞에 밀어닥친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피납 사건을 기상천외한 반전의 기회로 삼는다. 미래는 비관론자가 아니라 낙관론자가 여는 것이다. 낙관론자는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비관론자는 책임 소재를 가리게 돼 있다.
당시 몽골 최고의 실력자는 케레이트 부족의 옹칸이었다. 그는 칭기스칸의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였다. 칭기스칸은 옹칸을 설득하고, 자신의 의형제였던 자모카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메르키트 공략에 나섰다. 칭기스칸의 이같은 ‘아내 구하기 전쟁’에 대해 [몽골비사]는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몽골비사]는 몽골 유목민들의 역사를 알리는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한밤의 기습에 메르키트 백성들은 허둥대며
셀렝게강을 따라 급하게 도망쳤다.
테무진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버르테! 버르테!”를 절규하며 외쳐댔다.
그리운 아내를 애타게 찾았다.
바로 그때 도망치는 한 무리의 백성들 가운데
그 소리를 듣고 우차(牛車)에서 뛰어내리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자기를 부르는 곳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리고 번쩍번쩍 빛나는 테무진의 말고삐와 말에 맨 끝들을 움켜 잡았다.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버르테!”
말없이 흐르는 격정의 눈물 속에 테무진과 버르테는
서로를 맹렬히 끌어안았다.
2년 만에 아내를 구출한 칭기스칸, 그러나 아내 버르테의 뱃속에는 적장 칠게르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버르테는 남편과 재회한 후 곧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주저하지 않고 이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였다. 그는 아이에게 “우리 몽골인에게 나그네처럼 다가온 아이”라 하여 ‘조치’(나그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적의 딸을 ‘며느리’로 삼는 것과 적의 아들을 ‘아들’로 삼는 것은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훗날 칭기스칸의 후계자 문제가 거론됐을 때, 아버지가 다른 형제인 장남 조치와 차남 차가다이가 싸움을 벌였다. 둘은 칭기스칸 앞에서 몸싸움까지 벌였다. 그때 몽골의 샤먼이자 가족의 보호자 격인 쿠쿠추가 나서 두 사람의 어머니인 버르테를 변호했다. [몽골비사]는 이렇게 전한다.
그대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제 담요에서 아니 자고
서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럴 때
다른 남자를 원해서 간 것이 아니다
교전 중에 그리 되었다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전투 중에 그리 되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 것이 아니다
서로 죽일 때 그리 되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함께 고생하며
높다랗게 머리를 묶고
잘끈 허리띠를 동여매고
모자를 단단히 눌러 쓰고
그대들을 기를 때
음식을 삼킬 사이에 그대들을 주고
당신의 목구멍을 좁혀
당신의 모든 것을 주고
주린 채 다녔다
그대들의 빗장뼈를 당겨
남자답게 누가 만들었는가?
그대들의 목을 잡아 늘려
사람답게 누가 만들었는가?
그대들의 몸을 씻기고
그대들의 발꿈치를 들게 하여
남자의 어깨뼈에
거세마의 엉덩이에 닿게 하고
이제 그대들이 잘되기를 보겠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는가?
고통과 희생의 나날을 보낸 어머니의 삶을 듣고서 두 아들은 싸움을 멈췄다. 이 싸움을 목격한 칭기스칸은 조치에게 새로운 땅을 개척할 것을 명한다. 기회를 얻은 조치는 러시아와 헝가리 초원을 향해 길을 떠났다. 조치와 그의 아들 바투칸이 건설한 새로운 제국이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킵차크칸국(알탄오르도)였다. 킵차크칸국은 일칸국, 차가다이칸국, 어거데이칸국과 함께 몽골 제국의 4대 칸국 중 하나이다.
우리 속담에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혹시, 조금 더 아픈 손가락은 따로 없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손가락이 특별이 약하거나 상처를 입고 있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칭기스칸은 가장 나이 많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조치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의 끈을 놓치 않았다. 유럽을 정벌하던 조치가 사망했다는 전갈이 온 날, 칭기스칸은 하루 종일 겔 안에 틀어박혀 슬피 울었다고 한다. 자식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상처속에서 자라난 자식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착민 중에서 강간 당한 아내가 낳은 자식을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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