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樂膳物 ♬

호로비츠

藝友 2012. 8. 30. 12:52

 

호로비츠

전세계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로부터 무한한 찬사와 존경을 받으며,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영광을 누린 피아니스트로 19세기에는 프란츠 리스트, 그리고 20세기에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1903~1989)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선 시대의 피아노 명인들, 즉 에밀 폰 자우어의 예술적 리리시즘과 모리츠 로젠탈의 강인한 지구력,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강건한 고전성과 요제프 호프만의 극한에 다다른 초낭만성,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모든 테크닉을 하나로 모아 세제곱한 듯한 호로비츠의 전지전능함은 아마도 리스트조차 구현해내기 힘든(악기 개발의 한계상)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의 광활한 스케일로부터 바로크적인 아기자기함까지, 쇼팽과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영혼으로부터 리스트와 스크리아빈의 파괴적인 자아까지, 향기로운 낭만적 색채의 팔레트로부터 지옥으로부터의 처절한 절규까지, 더 나아가 유머러스한 웃음으로부터 진솔한 눈물에 이르기까지 호로비츠의 손가락이 표현하지 못한 인간의 감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절대적 권위의 이름

당대의 모든 유명 피아니스트들은 호로비츠의 저 놀라운 제단 앞에 경의를 표했다. 슈라 체르카스키, 라두 루푸, 죠르쥬 볼레, 개릭 올슨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게리 그래프만, 바이런 쟈니스, 머레이 페라이어 등은 그의 연주에 항상 ‘유일무이하다’라는 형용구를 수식하여 존경을 표했다. 쇼팽 해석자로 이름을 날린 알프레드 코르토는 호로비츠의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 때문에 패배감을 느낀 나머지 공개석상에서 이 곡을 절대 연주하지 않았으며, 그의 라이벌로 인식되었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조차 자서전에서 자신보다 호로비츠가 더 나은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연주를 닮고자 젊은 시절 대부분을 투자하다가 포기해야만 했던(당시 모든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그러했지만)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등에 겸허함의 키스를 해야만 했던 알리시아 데 라로차, 자신의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아예 넘겨버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이미 다 완성했다고 토로한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고백을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호로비츠라는 이름이 갖는 절대적인 권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연주회는 일종의 종교적 제례에 비견할 만했다. 그의 연주 숨소리는 물론이려니와 음표 하나 하나의 울림과 쉼표까지 듣는 이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뼛 서게끔 하는 긴장케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1931년 28세의 호로비츠 모습 <출처: wikipedia>

 

피아노 페달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그의 날아가는 듯한 터치와 폐부를 찌르는 듯 공격적인 옥타브는 숨이 턱턱 막히게끔 하는 압도감을 전달해 주었다. 미스테리한 것은 그의 연주 자세였다. 전통적인 연주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 즉 모든 손가락을 쭉 펴고 손바닥이 건반 밑에까지 내려가도록 하며 새끼 손가락은 연주하지 않는 동안엔 항상 접혀져 있었다. 이러한 해괴한 연주 방식으로 그는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음향과 초인적인 테크닉으로 백만 볼트의 전기로 감전된 듯한 짜릿함을 청중들에게 선사한 것이다. 그의 피아노 역시 일반적인 스타인웨이 그랜드 그대로였지만, 그의 손길을 거친 가장 단순한 것조차 가장 난해한 과정을 거친 듯했다.

 

 

 

베를린에서 첫 서유럽 데뷔 무대를 갖다


호로비츠1903년 10월 1일 러시아 키에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문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모든 종류의 책과 음반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어린 호로비츠는 작곡가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으로부터 장래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임을 예언받았다고 한다. 동시에 음악 외에 모든 예술 분야를 공부하라는 격언까지 받았다. 12세에 키에프 음악원에 입학하여 안톤 루빈스타인과 차이콥스키의 제자인 펠릭스 블루멘펠트를 사사하여 낭만주의적 기질과 러시아적 기질 모두를 완벽하게 습득했다. 당시 호로비츠는 피아노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그로 하여금 생계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도록 재촉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나탄 밀스타인과 함께 많은 듀오 리사이틀을 가졌던 호로비츠는 1925년 베를린에서 첫 서방 연주회를 갖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고, 1927년 이후로는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1928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토머스 비첨의 지휘로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데뷔 무대는 그에게는 이정표와도 같은 기회였다. 느린 템포의 비첨을 따돌리고 3악장에서 ‘건반에서 연기가 날 정도’의 맹렬한 기세로 오케스트라를 압도해버려 평론가들과 청중들로부터 경이로운 현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해에 그는 동향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를 만났다. 당시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호로비츠의 주요 레파토리로서, 이 두 대가의 만남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위의 봉인을 호로비츠에게 물려주었다.

 

한편 이 시기는 이그나츠 얀 파데레프스키의 낭만적인 피아노 음색 또한 호로비츠의 뇌리에 깊게 박히게 된 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1933년에는 전설적인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만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 것이야말로 호로비츠 인생의 가장 큰 분수령이었다.


 

첫 음반 레코딩 무렵의 호로비츠의 연주 장면 <출처: wikipedia>

 

토스카니니는 자신의 딸 완다와의 결혼을 주선,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될 정도였는데, 토스카니니의 완벽주의는 당시 호로비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36년부터 39년까지 3년간 침묵을 지킨 호로비츠는 거침 없는 야생마 같던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하며 진정한 완벽주의자이자 고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40년대는 바이올린으로는 하이페츠, 피아노로는 호로비츠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많은 연주회를 함께 하며 녹음 또한 이루어졌고, 이 시기에 대표적인 녹음으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손꼽을 수 있다. 한편 195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레파토리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몇몇 작품에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위해 자신의 편곡을 붙이기도 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나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를 위한 카덴차 등이 그것으로서, 몇몇 순수주의자들에게는 공격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후배 피아니스트들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인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3년 1월 조지 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2월에 한 번의 리사이틀을 가진 뒤, 그는 12년 동안의 기나 긴 침묵기에 들어간다.

 

 

 

12년의 은둔을 깨고 등장한 카네기홀 재기 무대

CBS에서 몇 장의 앨범을 선보이는 것 외엔 일체의 연주회를 가지지 않았던 호로비츠는 1965년 5월 9일 카네기홀에서 재기 리사이틀을 갖기로 했다. 당시 호로비츠의 명성은 정말로 대단해서 매표 시작 이틀 전부터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카네기홀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부터 서쪽 57번가로 이어져 6번 도로 모퉁이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다음 블록까지 줄을 서 있었다. 호로비츠는 사람들이 그렇게 늘어서서 표를 사려고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이 무료로 커피와 도너츠를 먹을 수 있도록 이동 매점 트럭을 56번가로 보냈을 정도다.

 

이 날의 연주회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그 역사적인 순간의 감동을 재생할 수 있다. 마음의 부담을 대변하는 듯 프로그램 첫 곡인 바흐-부조니 [토카타] 첫 시작음에서 한 번의 부정확한 음이 등장하긴 했지만 이후로는 완벽한 테크닉과 표현력으로 듣는 이를 꼼짝할 수 없을 정도의 살벌한 긴장감과 숭고한 피아노 음향의 세계를 선보였다. 특히 어린 시절 호로비츠의 가능성을 예언했던 스크리아빈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로서 선보인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9번 ‘흑미사’]의 강렬한 마법효과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호로비츠의 장인인 지휘자 토스카니니(왼쪽)와 호로비츠, 지휘자 브루노 발터
(오른쪽)의 모습

 

이렇게 두 번째 재기를 가진 호로비츠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를 완벽하게 아우르며 내면과 외면이 하나를 이루는, 일종의 반인반신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가 녹음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많은 피아니스트들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끔 했다. 스카를라티 소나타는 바로크 건반음악에 대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칭송받게 되었으며, 쇼팽의 마주르카와 발라드는 지극히 폴란드적인 루빈스타인의 해석을 뛰어넘어 범유럽적인 예술적 지표로서 재평가받게끔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대한 정체성을 강조한 나머지 오케스트라 협연은 몇몇 기념적인 연주회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았을 정도다.

 

 

 

세번째 공백기 - 마지막 낭만주의자의 웅비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세 번째 공백기를 갖은 호로비츠는 보다 공격적이고 자기과시적이며, 심지어 악마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증폭된 표현력에 치중한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메피스토 왈츠]에서 자기 안에 악마가 살아있다고 토로했을 정도의 아찔한 음향의 다이내믹과 예리한 터치를 보여주었고, 1978년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라흐마니노프의 동료인 유진 오먼디가 이끄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녹음하여 7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악마와도 같은 수퍼-비르투오소임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이 날 호로비츠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피아노 해머에 옻칠을 하고 단상을 지휘자보다 높게 올려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음향을 만들고자 했다. 음반을 들어보면 피아노 음과 음향이 정상적이지는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 자신이 ‘살아있음’을 과시했던 호로비츠는 지나친 욕심 때문일까, 1983년 일본 공연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연주회를 망쳤던 그는 잠시의 휴지기를 갖고 생의 마지막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1985년부터 86년에 그는 미국과 유럽을 거쳐 자신의 조국인 러시아까지 방문하여 연주회를 열고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얻게 된다. 특히 85년 모스크바에서 가진 실황은 눈물과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가 연주하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노신사의 모습이 찍힌 실황 영상은 지금도 회자되는 장면이다. 그의 [트로이메라이]는 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 재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스크바 실황을 비롯하여 독일 함부르크와 베를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의 실황 연주회가 최근 음반을 발매되어, 노년의 호로비츠가 일구어낸 그 순결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아직도 살아있는 수퍼-비르투오소로서의 카리스마를 정확하게 감상할 수 있다. 한편 그는 모차르트 음악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생의 마지막을 바쳐 자신의 모든 프로그램을 통해 모차르트를 선보였는데, 특히 30여년만에 스튜디오에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이끄는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녹음으로 남긴 것이 기록할 만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부부로부터 메달을 수여받으며 익살스런 미소를 짓는 호로비츠

 

 

그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호칭은 어쩌면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보다 더 오래 산 낭만주의 피아니스트들도 여럿 있을 뿐더러, 그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정점으로 보는 것에도 많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피아니즘이 그토록 황홀하고 초월적이었던 탓에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호칭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있어서 한 시대를 회상하고 특징지울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훈장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뉴욕 타임즈 부고란에 자신의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짓곤 했던 그는, 1989년 11월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1주일이 지난 뒤, 머레이 페라이어 부부와의 저녁 약속을 몇 시간 앞두고 영면의 세계로 날아가버렸다.

 

대표음반

호로비츠가 남긴 대표음반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협연한 차이스키 [피아노 협주곡](RCA) 바비롤리/뉴욕필과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APR),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RCA), 카네기 홀 컴백 리사이틀(SONY), 슈만 [크라이슐레리아나], [어린이 정경](SONY), 스카를라티 [소나타집](SONY),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메피스토 왈츠](RCA), 호로비츠 [리디스커버드](RCA), [호로비츠 인 모스크바](DG), [호로비츠 인 베를린](SONY).

 

약력
1925년 베를린에서 첫 유럽 연주회
1928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차이스키 피아노 협주곡으로 미국 데뷔
1933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베토벤 시리즈 진행
1953년 12년 동안의 침묵기
1965년 카네기 홀에서 재기 리사이틀
1978년 유진 오먼디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미국 데뷔 50주년 연주회
1983년 일본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연주회를 망친 뒤 휴지기
1986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연주회
1987년 밀라노에서 줄리니의 지휘로 생의 마지막 협주곡 레코딩
1989년 마지막 레코딩을 남긴 뒤 세상을 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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