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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족

藝友 2008. 3. 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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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족의 공연을 관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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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족 Chechen

♠ 위치 및 분포지역
체첸족은 러시아 연방의 인구 1억 4천 7백명 가운데 8번째로 많은 인구를 구성하는데 약 0.6%인 89만 9천여 명이 있다. 이중 약 70여만 명이 체첸공화국에 거주하고 잉귀쉬 공화국에도 다수 분포한다. 그 밖에도 카작, 터키에 일부 있다.
체첸공화국은 잉귀쉬공화국과 함께 나란히 붙어 있고,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총 면적은 잉귀쉬공화국과 합쳐서 약 19만 3천km2에 이르고 석유자원이 풍부한 카프카즈 지역의 산악국가이다.

  ♠ 기후 및 자연 환경
  대륙성 기후이며 대카프카스 산맥 중앙부의 북쪽 사면에 위치해 있고 테레크강 유역에는 스텝이 자리잡고 있다.

  ♠ 언어  튀르크어계의 체첸-잉귀쉬어

  ♠ 역사
체첸과 잉귀쉬 두 민족은 모두 카프카즈 인종이며 같은 나흐족(Nakh) 일파로 7세기경 동시에 이 지역에 나타났고 그후 10여 세기 동안 함께 이 지역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제정 러시아에 강제로 편입됨으로써 러시아인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갖고 살아왔다. 18세기 말 팽창정책을 폈던 러시아가 카프카즈 정복에 나섰을 때 이들 산악민족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카프카즈 전쟁은 거의 반세기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1859년에 이르러서야 결말을 맺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군이 승리하긴 했으나 당시 유럽 최강을 자랑했던 러시아 육군은 수차례에 걸쳐 격퇴되는 곤경에 처하고, 막대한 희생과 전쟁비용을 소모했다. 이 전쟁 당시 동부에 거주하던 나흐족은 러시아에 격렬히 저항한 반면, 서부의 나흐족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 후 러시아인들은 이 두 집단을 각각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써 이 두집단의 거주지역 중 큰 도시의 이름을 따라 동부의 나흐족을 '체첸', 서부의 나흐족을 '잉구쉬'라 구별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도 체첸 민족과 러시아간에는 치열한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한 체첸인들은 자신들의 저항을 성전(聖戰)으로 규정하고 전투적인 이슬람 교단을 중심으로 해방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0월 혁명과 내전시기에는 한때 인접한 다게스탄 지역에 이슬람국가인 '다게스탄 체첸 회교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소련군이 이들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구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혁명 후 레닌은 제정 러시아에 의해 짓밟혀 왔던 체첸의 굴종적 역사를 상기하여 '러시아 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체첸인을 비롯한 모든 이슬람교도들의 권리를 보장했었다.
그후 1936년에 이르러 체첸-잉구쉬 두 자치구가 합병하여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의 스탈린베리야의 숙청바람으로 1937년 여름부터

1938년까지 체첸-잉구쉬 자치 공화국을 포함한 북 카프카즈 전역에서 지식인과 지방당 간부들이 총 10만 명이 체포되어 일부는 처형되고 나머지는 타지역으로 강제 추방되는 비운을 겪었다. 1940년 초 체첸인과 잉구쉬인들은 하산 이스라일로프(Khassan Israilov)의 지휘로 구 소련 정부에 다시 저항했으나 1942년 말에 진압되고 말았다.
체첸인에 대한 러시아의 박해는 제2차대전 말기 또 다시 전개되었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당국은 이 지역을 일시 점령했던 독일군에게 체첸인들이 협력했다는 의심 하에 1944년 2월 체첸-잉구쉬인 거의 전체에 해당하는 약 50만 명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강제이주 대열에서 도망친 소수 사람들은 카프카즈 산악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을 괴롭혔고, 강제이주와 게릴라 투쟁 과정에서 약 23만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 소련 당국의 민족 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체첸-잉구쉬인의 연대감을 북돋우며 고향으로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수피 타리카스(Tariqas; brotherhoods)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의 노력과 흐루시초프의 개혁노선에 힘입어 1957년 체첸민족은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고향으로의 귀환이 허용되었으며 자치공화국으로 부활되었다.
그후 소련이 붕괴해가는 와중에서 1991년 10월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러시아로부터 체첸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잉귀쉬 역시 1992년 10월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더 나아가 이 두 공화국은 1993년 12월 채택된 러시아 연방헌법에 의해 각각 신생 러시아연방의 구성공화국으로 공식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정치
  체첸은 최근에 국명과 수도명을 바꾸었다. 국명을 '이츠케리야 체첸'공화국으로, 수도인 그로즈니를 '조하르시'로 각각 공식 개명했다. 이번 개명은 체첸 독립의지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츠케리야'는 체첸 강경파들이 독립국 체첸을 강조할 때,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체첸 남부 산악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인데, 이 지역이 18세기부터 대러시아 무장항쟁의 거점이 되면서 체첸독립의 상징어가 되었다. 체첸게릴라들은 스스로를 '이츠케리야 전사'라고 칭해왔다. '조하르'는 체첸 독립투쟁의 상징인 고 조하르 두다예프 전 체첸대통령의 이름에서 따 온 명칭이다. 그는 구소련군 공군출신으로 체첸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91년 10월 체첸 대통령으로 선출됐었고 그후 체첸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지난 96년 4월 무장투쟁 도중 전사했다.

♠ 산업 및 경제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이자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차점인 카프카즈지역의 토착족인 체첸족들은 전통적으로 대부분 유목민족이었다. 비록 유전과 천연가스의 발견이 자원 발전과 섬유화학 공업을 이끌었으나 대부분이 여전히 목축업, 양치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 사회 및 문화
  숱한 수난을 감내했던 이들 체첸 민족은 본시 옛부터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를 간직해 온 독특한 민족으로 특히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용맹성은 특기할 만하다. 그들은 조국방위라는 결연한 자세로 남자는 만 7세가 되면 무기사용법을 배우고, 지금도 체첸인 대부분은 단검과 단총, 자동소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가족이나 친척이 피살될 경우엔 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피의 보복을 하는 것을 계율로 삼고 있다.
  러시아의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자민족 종교인 이슬람과 민족 언어를 지키려는 체첸인들의 열망은 역사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카프카즈민족들의 저항운동의 한 표본이며, 이러한 자민족 종교와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애착은 구소련 붕괴 후에도 반러시아 저항운동을 통해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다.
  체첸인들의 저항 의식은 너무도 대단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체첸과 다게스탄지역을 중심으로 저항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민족 재배치 정책에 있어서도 그 첫 번째 대상이 체첸인들이었다. 최근 발생하였던 체첸인들의 인질극 사건과 러시아의 유혈 진압 등으로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체첸은, 체첸 공화국 내의 막대한 석유 이윤과 소수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주변 국가들의 냉담한 정세로 인해 그토록 갈망하는 독립은 현재 요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ISSUE - 체첸사태
1. 체첸 사태의 경과 
체첸 사태의 시발점은 1991년 8월 삼일천하 쿠데타 이후 체첸의 지도자 두다예프가 친 러시아적인 잉구쉬와 결별하고 모스크바 당국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회유가 위협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체첸의 독립을 선포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11월 8일 체첸의 독립선포와 관련하여 체첸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수도 그로즈니에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무기압수와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급기야 12월 1일 러시아 공군기들이 그로즈니를 공습하기 시작했고, 9일에는 옐친 대통령이 체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동원가능한 모든 주치를 취할 것을 내각에 지시하였다. 11일에는 러시아군의 체첸지역 무력진공이 개시되어 이로부터 상호교전이 시작되었다. 14일에는 평화협상이 열리긴 했으나 양측의견은 완전히 상충되었고 러시아군의 공습과 지상군의 공격은 점차 강화되었다. 12월 31일 마침내 러시아군이 수도 그로즈니에 진입하여 대통령궁은 화염에 휩싸였고 1995년 1월 1일 러시아 정부는 수도 그로즈니를 제압했다고 발표했다. 1월 5일 유럽안보협력기구는 의장성명을 통해 러시아의 군사행동 정지를 요구했으나 옐친 대통령은 '단기무력제압'이라는 강경방침을 천명했다. 1월 19일 러시아 정부군은 그로즈니의 대통령궁을 제압했다고 발표하였고, 체첸사태가 장기적인 게릴라전 양상으로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25일 러시아 안전보장회의는 군사작전을 종결하고 내무부 산하 경찰작전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한동안 소강상태애 들어갔던 체첸사태는 계속 게릴라전으로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2. 체첸사태의 성격
체첸 사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체첸사태는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 1990년 10월에 결성된 이슬람계 '체첸민족회의'의 의장 두다예프의 권위주의적 지배와 이에 반발하는 친러시아 성향인 아프트라노프 중심의 '잠정평의외' 간의 권력투쟁이 체첸사태를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
둘째, 체첸사태는 회교도들의 항전 즉 종교전쟁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체첸공화국 국민 대부분이 수니파 회교도로서 카자흐스탄, 우즈벡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직스탄 등 중앙 아시아 제국들과 가까울 뿐 아니라 인근 회교국가인 터키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대 체첸공격에 대한 이슬람권의 시각은 전적으로 종교적 차원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단적으로 러시아 정교집단에 의한 이슬람의 탄압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또한 체첸인들의 강경한 자세와 전투에서 발휘되는 용맹성과 집요한 투쟁 또한 여타 이슬람권 민족들의 경우와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또한 이란과 터키,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 회교국가들이 체첸사태에 우려를 표시하고 의용군 파병문제까지 제기하는 등 비상한 관심을 보였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셋째, 체첸사태는 피할 수 없는 민족분쟁이다. 구소련은 126개의 크고 작은 다민족들로 구성된 국가이고 이중 1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지금의 러시아연방 내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의 민족동화정책과 러시아인의 이주정책 등으로 대부분의 민족공화국들은 기간민족이 50%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체첸공화국만은 체첸인이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정이 체첸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한 주된 요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지난해 체첸사태가 발발한 이래 이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이 불안한 정국을 피해 러시아지역으로 피난을 감행함으로써 체첸민족이 차지하

는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는 대부분 강압적 복속에 의해 다민족 국가를 형성하였다. 지난 18세기 말엽부터 무려 반세기에 걸친 정복사는 그 당시뿐 아니라 그 후에도 지속적인 반격을 받았고 최근에 이르러서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 종교
  순니이슬람이나 전통 이슬람의 대부분이 악령에 대한 공포에 쌓여 있는 애니미즘과 이슬람의 혼합 형태를 나타낸다. 구소련 자료에서는 체첸인들과 잉귀쉬인들이 가장 이슬람이 강한 집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무슬림 형제 결속을 강조하는 이슬람 수피집단의 관습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소련 정부의 강한 반이슬람 정책에도 불구하고 체첸인들은 민족의 종교인 이슬람을 더 강하게 신봉하게 되었다.     

  ♠ 기독교 상황
  구소련 이슬람계 종족 가운데 가장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며 전통 수피즘과 민족 감정이 강하게 응집해 있어 민족 단결력이 매우 강하다. 알려진 그리스도인들은 없으며 몇몇의 러시아 선교기관들의 활동이 있으나 체첸 사태 이후 활동이 거의 정지된 상태이다.  성경번역은 1986년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출판되었다. 더불어 신약의 번역들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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