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제 일곱 살이었다. 그 어린 아이에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네. 듣는 내가 다 황망하다. 물론
온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 했으니 괘씸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렇지.
퇴근하여 집에 갔더니 딸아이가 해야 할 공부는 뒷전이고 TV 앞에 앉아 히히덕거리고 있다. 왜 주어진
것들을 다하지 않았냐, 빨리 마무리 해라. 어쩌고 저쩌고 하며 잔소리 좀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 땜에 스트레스 받아서 못 살겠어."
순간, 아뜩해졌다. 저 어린 것이, 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는 몸 쓰는 일을 한다. 결혼한 지 8년 되었지만 아기 낳
고 두 달 쉰 것 말고는 거의 쉰 적이 없다. 하나 밖에 없는 딸, 남보다 더 번듯하게 키우려면 돈을 벌어
야 했기 때문이다. 잘 가르친다는 곳이 있으면 아무리 교육비가 비싸도 주저하지 않았고 몇 십만 원씩
하는 비싼 옷도 망설이지 않고 턱턱 사주며 아쉬울 게 없이 키웠다. 그런데 엄마 땜에 스트레스 받아서
못 살겠다니!
"내가 지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아는 이가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며 전화를 했다. 특별한 날 아니어도 종종 식사를 했던 사람이라 무슨
날이냐고 묻지 않고 나갔다. 그런데 무척 상심한 얼굴로 앉아 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왜 그러느
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서글프네. 내가 지들한테 어떻게 했는데...."
한숨이고 탄식이다. 세상 다 살아버린 것 같은 낙망이 여실하다.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런데 종일 기다렸지만 두 아들네 집에서는 아무도 전화 한 통 없다. 아들은 물론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조금 전 큰며느리에게는 옆구리 찔러 인사 받았다. 물론 전화로만. 그런데도 아들
은 말 한 마디 없고 작은 아들네는 아예 모르고 있는 건지 큰며느리에게 연락 받고도 일부러 전화를 하
지 않는 것인지 꿩 구워먹은 소식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특별한 기념행사까지는 못해주더라도 전
화 한 통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차 타고 오면 30분 거리인데 잠시 다녀가면 더 좋고 아니라면 어떤 방
법으로든 축하 인사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새벽까지 식당일 하며 벌어들인 돈 300만원을 두 아들네 집에 나눠줬다. 환갑 넘은 나이에 남의 식당
일 하러 다닌다는 게 서글프긴 했지만 그렇게 벌어 두 며느리 손에 얼마씩 쥐어 주고 나니 행복했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식들 결혼시켜 놓고는 용돈 한 푼 준 적 없었는데 시어머니가 돈
번다고 손주 맛있는 것 사주라며 한 두 푼 쥐어주는 재미도 쏠쏠했고, 집 넓혀 이사하느라 쪼들리게 살
고 있는 며느리 손에 이백만원이나 되는 돈 쥐어주는 재미는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내가 힘들어
도 기쁜 마음으로 일해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했던 것도 그런 소소한 행복 때문이었다. 그게 보름 전 일
인데 부모 결혼기념일에 전화 한 통 안해?
부모가 자녀들에게 정성을 쏟고 사랑을 베푸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식의 생각을 하거나 이
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어 자식들을 난감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인격이 고매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
보다 얼마나 더 많이 베풀었느냐, 혹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했느냐가 관건이 아닌가 싶다. 가령 남편
없이 혼자 살면서 어렵게 자식을 길렀다면 자식에게 거는 기대가 남과 다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데 애면글면 키운 자식은 저 혼자 큰 줄 안다. 이럴 때 엄마 마음은 한없이 섭섭해지고 함께 사는 며느리
에게까지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된다.
되돌려 받고 싶은 심산으로 자식들에게 베푸는 부모가 어딨겠는가만 많이 쏟아 부었다고 생각할수록 서
운함이 큰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자식이 부모 마음 다 헤아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죽하면 한 부
모가 열 자식 건사해도 열 자식이 한 부모 섬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까. 부모와 자식은 이렇게 다르다.
자식에게 기대하면 내 마음만 다친다. 그저 부모는 부모된 도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지 않
으면 쫀쫀하고 치사한 사람으로 치부되거나 부모 자식간에 서로 등을 보일 수 있다.
아버지(어머니)만 그랬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다른 부모들도 다 그 정도는 해요, 라는 말까지 듣
게 되면 얼마나 원통할 일인가.
자녀들에게 무한정 쏟아 붓지도 말고 빈 껍데기만 남도록 모두 줘버리지도 말아야 한다. 새벽까지 식당
에서 설거지해서 번 돈, 며느리들에게 몽땅 털어줄 게 아니라 결혼 기념일에 여행도 가고, 남편에게 멋
진 옷도 한 벌 사주며 수고한 나를 위해서도 예쁜 티셔츠라도 하나 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아들 며
느리는 아직도 살 날이 창창하고 능력도 있으니 일 이백만 원 없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일곱 살 딸에게 크게 한 방 먹은 엄마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어지간히 해라. 허리가 휘도록 무리
를 해 가며 자식 뒷바라지 해야 할 이유가 뭔가. 한 달에 몇 십만원씩 하는 학원 안 다닌다고 사람 구실
못하는 것 아니다. 또 몇 십만 원짜리 옷 안 사주면 어떤가. 몇만 원 짜리 옷 입혀도 부모가 올바른 정신
으로 키우면 잘만 큰다. 내 능력껏, 내 형편껏 해주고 제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는 말도 하지
마라.
자식들에게 다 줘버리고 지지리 궁상스럽게 살며 날마다 어디가 아프다 어디가 안좋다, 하는 부모를 좋
아할 자식은 아무도 없다. 자식이 내 노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고 탓하거나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
냐며 애통해 할 일이 아니다. 적당히 하고 내 살 궁리 내가 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
데, 하는 원망도 하지 않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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