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 名畵

그림여행

藝友 2016. 11. 9. 23:26

오거스터스 에드윈 멜레디 - 런던 길거리 아이들의 눈물을 담다.

 

가을이 왔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겨울 같은 날의 연속이다.

점점 짧아지는 가을이 훗날 아주 사라지는 것 아닌가 걱정이다.

추운 겨울은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이 견뎌내기 힘든 시간인데.......

그런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있다.

오거스터스에드윈멀레디 (Augustus Edwin Mulready / 1844~1904)

작품 속 아이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방랑하는음악가들Wandering minstrels / 68.7cm x 89cm / oil on canvas / 1876

 

탬버린을 든 소녀는 오빠의 품에 기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 동생을 꼭 안고 피리를 꼭 쥔 채로

오빠도 차가운 돌 기둥에 몸을 의지했습니다.

하루 종일 피리를 불고 탬버린을 치며 거리를 떠 돌며 먹을 것을 해결했지만

잠자리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아이들이 어떻게 여기에 이르게 되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맨발인 사내 아이의 모습에서, 바지가 찢어져 훤히 들어나 보이는 가냘픈 다리에서

지금의 상황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밤이 깊어지자 숲으로 산책을 나왔던 사람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과 아이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일까요?

시 지금 아이들이 꿈을 꾸고 있다면 그 꿈은 어떤 것일까요?

가슴이 시려 옵니다.

 

 

 

보살핌을받지못한아이들Uncared for / 101.cm x 76cm / oil on canvas / 1871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큰 눈을 한 소녀가 꽃 한 송이를 내밀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곳에서 꽃을 팔기 위해 서 있었는지 시든 꽃 잎들이 소녀의 발 옆에

떨어져 있습니다. 광주리에 앉아 있는 소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습니다.

거친 길을 맨발로 다녔을 아이들 생각에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털었습니다.

바로 옆 길에는 우아하게 차려 입은 어른들이 지나가고 있고

소녀가 서 있는 벽에는 기독교의 승리라는 벽보가 붙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승리했다는 것인가요?

 

 

 

 

런던브리지의후미진A recess on a London Bridge / oil on canvas / 1879

이 소년도 편하게 잠 잘 곳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하루 종일 지친 몸을 런던 브리지의 구석진 곳에 기대자 그냥 잠이 쏟아 지고 말았습니다.

먹다 남은 빵 조각과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린 몸이 감당하기 힘든

일상이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려 옵니다.

어린 아이들이 힘든 것은 모두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겪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기회도 없었거든요.

꿈 속에서라도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거리의파는소녀A street flower seller /oil on canvas /1882

목에 사각형 바구니를 걸고 꽃을 파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붉고 흰 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꽃 한 송이를 제게 내밀었습니다.

당연히 사야지요.

지금 당장 꽃을 건네줄 사람은 없지만 손에 꽃을 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거든요.

그리고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꽃의 무게를 조금 줄여줄 수 있다면

그 것 또한 행복한 일입니다.

조금은 지친듯한 소녀의 눈에 힘을 실어 주고 싶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바뀌는 일은 동화 곳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란다. 세상은 절대로 그런 곳이 아니야.

그런데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조금씩 바꾸는 일은 가능하지.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물러서지마. 알았지?

 

 

 

 

우리의온화한사촌Our good natured cousin / 61cm x 51cm / oil on canvas

햇빛이 좋은 런던 거리,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보입니다.

모두 한껏 멋을 낸 모습들입니다. 한 발 앞서 걷는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쥐었습니다.

기생 오라비같은 얼굴인데 오직 앞만 보고 걷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분홍색 양산을 쓴 여인들도 서로의 이야기에 빠져 있습니다.

방금 그녀들이 지나친 우체통 앞에 꽃을 파는 소녀를 보지 못했습니다.

개도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꽃을 팔아 생활을 해야 하는 소녀를 돌아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온화한 사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런던의아이, 하루의A London Jo, The end of the day / 25cm x 17cm / oil on canvas / 1884

자세히 보니까 앞서 런던 브리지의 후미진 곳에서 잠이 들었던 아이였군요!

오늘도 이 곳에서 잠을 청할 모양입니다.

19세기 후반 런던에는 집이 없어 길이나 배 위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숫자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산업혁명이 진행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올라 왔지만 열악한 근로 환경과 턱없는 저임금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집 없이 거리를 떠 돌았고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로 인해

그림 속 아이들과 같은 환경이 만들어졌지요.

그 뒤로 부의 분배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길은 멀어 보입니다.

적어도 아이들이 찬 길 바닥 위에서 자는 것, 어른들이 꼭 막아야 할 일입니다.

 

 

 

 

스파이들 Little Spies / 30.8cm x 40.2cm / oil on canvas / 1886

무슨 일일까요? 붉은 커튼이 내려진 창 건너를 보려고 아이들이 난간에 매달렸습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광경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은데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고상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기준에 의하면 훔쳐 보고 싶은 것들은 제 나이에 걸맞지 않은 것이거나

내 돈을 내고 보고 아까운 것들이었지요.

오랜만에 아이들다운 아이들의 표정을 볼 수 있어 즐겁습니다,

그나저나 눈 오는 거리를 청소하다가 뒤늦게 합류한 아이 앞으로 크게 될 것 같습니다.

재빠르게 행동하다가 망한 사람을 여럿 보았거든요.

 

 

 

 

파는소녀들Flower girls / 54cm x 92cm / oil on canvas / 1885

퀭한 눈을 한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어 보였습니다. 하늘은 어두워졌고 이미 가로등과 집집마다

불을 켰는데 어쩌자고 저렇게 많은 꽃을 아직 들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꽃을 한 송이도 못 팔아서 눈 밑에 다크 서클이 그렇게 진한 것일까요?

옆에 있는 동생은 언니만큼 심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 세상의 엄혹함을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요. 이 자매의 꽃을 사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

어이, 거기 뒤에 걸어가는 아저씨들, 여기 좀 보세요.

꽃 좀 사서 여러 사람 행복하게 좀 만들어 보시죠!

 

 

 

 

어린파는소녀들Little Flower Sellers / 1887

 

이 골목에도 꽃을 파는 자매가 보입니다. 언니는 비록 구멍이 크게 난 앞치마를 둘렀지만

신발을 신고 있는데 동생은 맨 발입니다.

애처롭게 꽃 한 송이를 사달라고 말하는 어린 자매의 눈빛이 안쓰럽습니다.

그녀들 앞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까지는 아니어도 이 소녀들의 간절함을 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간절함은 꽃을 사 주는 것이겠지요.

소녀가 기대고 있는 벽에는 다가오는 기념일에 관한 벽보가 보이고 그 아래로는

런던의 빈곤에 대한 기사도 보입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세상 가운데에 두 자매가 서 있는 셈입니다.

멀레디는 다섯 아이 중 셋째로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화가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멀레디는 아일랜드 출신의 풍속화가이자 삽화가였는데 나중에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될 정도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할머니 역시 화가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의아버지도 초상화가이자 그림 수집가였습니다.

이런 가정 환경 속에서 자란 그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미술에 매료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핏줄에 화가의 유전자가 흐르는 까닭도 있겠지만

태어나자 마자 그림을 보고 자라는 환경도 무시 못할 요인입니다.

사우스 켄싱턴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한 그는 열 일곱이 되던 해 스스로를 이미

인물화가로 자리 매김을 했습니다. 대단한 자부심이지요.

1861, 그는 아카데믹 화법으로 역사화와 풍속화를 그리던

존 캘코트 호스리의 추천으로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 합니다.

존 호슬리는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그 후로도 멀레디를 지속적으로 후원합니다.

1903년에 호슬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호슬러를 아버지 보다 더 한 존재라고 회고했습니다. 어떤 관계였는지 짐작이 됩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풍속화가가 되었습니다.

1870, 그는 크랜브룩에 설립된 화가들의 모임에 참여합니다.

Cranbrook colony라고 알려진 지역에 모인 화가들은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일상의 풍속과 시골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에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도시의 모습도 그들의 주제였습니다.

1871년 그는 크랜블룩 콜로니의 창시자인 하디의 옆 집에 살았는데 이전의

그 곳 멤버들과 멀레디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바람에 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1874, 그는 런던으로 돌아 왔고 이후 그는 당대의 사회적인 이슈에 집중하게 됩니다.

특히 어른들의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의 작품의 주요 소재기 됩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영국과 웨일즈의 결혼 기록문서에는 그가1874, 서른 한 살이 되던 해

마리아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고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은 어쩌면 그가 아버지였기에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겼고 당대의 역사적인 내용을 반영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길거리의 꽃 파는 소녀들과 개구쟁이 아이들의 모습은

산업화가 남겨 놓은 어두운 단면이었고 그는 그 것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읽기가 쉬웠고 혼란스럽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대로 읽으면 되었습니다.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에 의해 발생된 문제들과 연결된 그의 작품들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두고감상적인 사실주의자라고 평가한 것은 어쩌면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 1904년 삼월 중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예순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배경 속에 벽보가 많이 보입니다.

그 내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것은 작품에 묘사된 장면을 위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벽보는 또 하나의 관찰 대상이 됩니다.

그의 작품 속 아이들의 모습은 대부분 우울한 환경 속에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담기도 했지만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한 모습들입니다.

지금이라고 그런 아이들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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