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영화에서 3.500원에 구입한 영화,
트로이 전쟁이나, 트로이 목마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고있고
신화라는것만 알고 있었지 영화는 첨이다.
어느 날 그리스의 여신인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아름다움을 다투는 일이 있었다. 심판을 맡았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그리스 제일의 미녀 헬레네를 차지하게 되었다.
헬레네의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들과 맞서는 트로이도 만만치 않았다. 위기 때마다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 그리스 군대를 물리쳤다.
이후 10년 동안 양측의 싸움으로 수많은 영웅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그러나 선물로 가장한 거대한 목마 속에 몰래 숨어서 트로이 내부로 들어간 그리스 군대가 트로이를 함락시켰다는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길고도 지루했던 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렇다면 헬레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파리스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인 데이포보스와 결혼했으나 트로이가 함락되자 그를 배신하고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과부가 된 헬레네는 의붓아들들에게 쫓겨나 로도스로 도망갔는데, 그곳의 여왕 폴릭소가 트로이 전쟁 중에 죽은 남편 틀레폴레모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녀를 교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것이 흔히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트로이 전쟁'의 대강의 줄거리다. 호메로스1)의 대서사시 「일리아스」2)와 「오디세이아」3)에도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실제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무언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땅 속에 묻혀 있던 전설 속의 트로이를 발견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하인리히 슐리만. 고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을 한 남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에 미케네도 발견함으로써 고고학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트로이는 어디에?
아나톨리아 지방 북서부, 스카만데르 강 북쪽과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킬로미터 떨어진 트로아스 평야 히사를리크 언덕에 트로이라는 곳이 있다.
1870년 4월, 이 지역에서 처음 발굴을 시작한 슐리만은 1873년 6월 드디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다. 황금잔과 왕관, 목걸이 등의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도시가 전설 속의 트로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이 유물들을 「일리아스」 속에 등장하는 트로이 왕의 이름을 붙여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고 불렀다. 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은 후에 베를린으로 옮겨졌지만, 불행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소련군의 침공 과정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슐리만은 처음부터 이 지역을 트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토로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보다 내륙 쪽인 부나르바시 근교라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슐리만도 최초에는 이 부나르바시 설을 주장했지만, 어떤 인물과 만난 후에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
슐리만에게 영향을 주었고, 트로이 발굴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 인물은 미국 부영사 프랭크 칼버트였다. 그는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히사를리크 언덕에 트로이 유적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히사를리크 언덕 일부를 직접 사들였을 정도였다.
아홉 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도시
칼버트의 연구와 슐리만의 노력으로 발견된 트로이는 대단히 복잡한 유적이었다. 트로이는 도시 위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는 복합 유적이었다.
트로이 유적은 그 연대에 따라 크게 아홉 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