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 名畵

생 라자르 역

藝友 2020. 6. 28. 22:43

첫 번째 전시회를 열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상파 화가들은 경제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살롱의 환영은커녕 이들의 그림을 구매해줄 미술 시장은 여전히 성숙하지 않았다.

악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예술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피사로 (일각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프랑스 화가)처럼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아르장퇴유를 떠나서 파리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화가로 살마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살아간 방식은 단순했다.

한번 큰 건수를 올리면 당분간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식이었다.

르누아르가 대표적이었다.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돈으로 연명하면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첫 번째 인상파 화가전을 한 뒤로 몇 년이 흘렀다

1877년 모네는 엉뚱한 그림 하나를 구상했다. 비평가가 내뱉은 비난에서 그림에 대한 발상이 일어났다.

어떤 비평가는 인상파 화가전을 둘러본 뒤에 르누아르의 그림을 두고 '불쌍한 장님 천치들'이라고 조롱했다

안개가 끼어있는 풍경을 너무 선명하게 그렸다는 것이 불만이었다.

모네는 이런 비난을 되받아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생 라자르 역 시리즈'다.

 

안개 타령을 하니 그 안개를 그려서 보여주겠다는 심사였다

생라자르 역은 근대적 삶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파리에 있는 6개의 기차역 중 하나인 생 라자르 역을 가로 질러서 유럽의 다리가 지나간다 .

유럽의 다리는 나중에 인상파에 합류한 카유보트의 그림에 등장하는데

모네도 생 라자르 역에서 올려다 본 유럽의 다리를 그렸다.

모네가 살던 아르장퇴유에 가려면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모네에게 익숙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생 라자르 역은 교외와 파리를 잇는 기차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증기 기관차의 시대였으니 엄청난 수증기와 연기가 서로 뒤섞여서

근대적 일상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냈을 것이다.

파리지앵들에게 기차는 단순한 탈 것을 넘어서서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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